내고향-보성회천

[스크랩] 봇재와 율포, 그리고 '서편제'

비탈- 2006. 2. 2. 19:46



 

¨            살기 위해 달음박질 치던 고개 – 봇재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에 위치한 봇재는 보성읍에서 회천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봇재 정상에 서면 발 아래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보성 차밭이 바다 물결처럼 일렁인다.  산기슭의 구릉을 따라 녹색으로 일렁이는 차밭의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럽다.  현재 봇재는 차 밭 덕분에 전국에서 1년에 200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지만, 몇 십년 전만 해도 회천 앞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를 새벽시장에 팔기 위해 모여든 아주머니들이 광주리를 이고 싱싱할 때 팔기 위해 죽기살기로 달음박질쳐서 넘어 다녔던 고개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보면 제비가 건물의 보에 집을 짓는 형세가 있는데, 봇재가 그 형국이라 해서 봇재라고 하기도 하고, 항상 보성 쪽에 안개가 많이 끼는데 그 안개가 회천 쪽으로 넘어올 때 봇물이 넘어오는 듯하다고 해서 봇재라고도 한다.”보성문화원장 김용환씨의 설명이며 또 다른 설명은 제암산과 사자산으로 장흥과 보성을 가른 호남정맥은,  다시 북동진하여 일림산과 활성산으로 솟구치면서 남쪽으로 회천땅을 감싸안 듯 버티고 서 있다.  그 모양이 들보와 같다하여 이름이 '봇재'이며,  고개 아래에는 들보 '樑(양)' 자를 써서 붙인 양동 마을이 자리해 있다.

 

 

 

¨            “하루에 몇 백명이서 개간하러 다녔어.”

 

봇재에 차밭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1939년이고 일본인 회사였던 경성화학(주)에서 차 종자를 들여와 야산에 30ha를 심었다가 수확할 즈음 광복을 맞이하여 폐원이 되었다.  해방 후 이 다원은 국방부에 귀속되었다가 현재의 대한다업(대표 장영섭)에 인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일하던 할머니는 “첫머냐는 김두환씨라고 지금은 고인이 되았는디, 그 냥반이 시작했지. 우리가 개간하러 댕기고 그랬어. 그때는 지금 차밭 자리만이 아니고 여그저그 다 심고 댕겼제. 하루에 몇 백명이서 개간하러 다녔어. 보성읍, 회천면, 웅치면 사람들까지 한 300명도 넘었을 것이여. 날마다 삽 들고 가래 들고 쌀 한 됫박씩 품삯으로 받고 댕겼제. 그것 갖고 묵고 사니라고.”

 

그러나 3년쯤 후에 서울 사는 장영섭씨가 인수하였고 지금의 대한다원으로 변해 왔다고 한다.  현재 대한다원의 차나무들은 그 당시에 심었던 것들이 많다. “절에 가믄 스님들이 따묵을 만치 차나무가 다 있었거든. 이것이 그 차나무인갑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으러 다녔제.” 보성 봇재 차밭은 첫 30ha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272농가가 646ha에서 차를 재배, 전국 생산량 약 46%를 차지하고 있다.

 



¨            푸근한 포구 – 율포

 

잂출 광경을 보기 위하여 봇재 너머에 있는 율포해변으로 가서 해 뜨는 곳을 향하여 해뜨길 기다리니 오늘은 날이 흐려 크게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가보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어촌 마을이지만 이 율포는 아직도 싱싱한 갯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갓난아이 새끼손톱 크기의 작은 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이 놈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할 정도로 율포는 해변의 정경도 참 푸근하다. 한쪽에서는 바지락을 캐는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그 뒤로 한가롭게 떠 있는 고깃배들이 평안하기 그지없다.

 

 

 

¨            차밭 아래는 ‘소리마을’- 소릿재

 

봇재 정상에서 율포 앞바다 쪽을 내려다보면 차밭 아래로 송계 (松溪) 정응민 선생이 조상현 등 수많은 소리꾼을 길러냈던 소리마을인 도강마을이다. 그래서 봇재는 소릿재로도 통한다. 정응민선생(1896∼1963)은 본래 장흥군 안양면 신촌에 살던 백부 정재근에게 소리를 배워 회천으로 분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회천과 신촌은 지척의 거리다. 정재근은 서편제를 창시한 박유전(1835∼1906)에게 소리를 배웠고, 박유전이 터를 내린 곳은 지금의 보성읍 대야리 강산 마을이다.  1950년대 정응민 선생의 집에는 소리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2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들이 정응민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봇재를 넘나들었을 것이니, 득음에 이르려는 원이 담긴 소리가 이 고개 너머까지 가득 찼을 것이다.

 

 

 

¨            보성 소리 – 서편제

 

차밭 너머 산 아래 쪽으로 양동· 영천· 도강 마을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마을들과 들판을 따라가면, 그 끝에 반짝이는 게 남해 바다다.  거문도와 거금도, 완도 등의 섬을 휘감으며 밀려들어온 바다는 이곳에 와서 손바닥만 해진다.  그 물결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눈부시다.  가늠할 수 없는 그 바다의 넓이와 깊이 앞에 사람들은 무시로 굿을 올렸고, 그 때마다 춤과 노래와 악기로 화해와 갱생의 다리를 놓던 靈媒者(영매자)들은 다름 아닌 전라도의 단골들이었다.  그런 리드미컬한 풍광이 남도의 몸짓을 낳고 말을 낳고 소리를 낳았을 것이다. 이른바 서편제 판소리를 낳고, 오늘날 그것의 큰 줄기를 이룬 '보성소리'를 낳았을 것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판소리의 유파에 대해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 이쪽을 동편이라 하고, 서는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하여 광주, 나주, 보성 등지 저쪽을 서편이라 하였다.  박유전은 조선 헌종 1년에 동편제의 고장인 순창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소리를 공부한 곳은 보성이었다.  그들의 발길에 닳고 닳았을 봇재의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그가 산 도강 마을에 이른다. 그곳 후미진 산자락 그의 집터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소리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로 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름이면 소리꾼들이 공부하러 들어간다는 영천의 흑운폭포도 그곳에서 멀지 않다.

 

 

출처 : 봇재와 율포, 그리고 '서편제'
글쓴이 : 然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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