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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K리그의 거인’ 신태용, 13년간의 전설을 마감하다..

비탈- 2005. 4. 3. 00:51

<<< 출처 : 대한축구협회 >>>

 

K리그의 거인’ 신태용, 13년간의 전설을 마감하다.

 


13년간의 K리그 생활을 마감하는 'K리그의 전설' 신태용 ⓒ스포탈코리아 이상헌

1983년 첫 시즌을 시작해서 어느덧 23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K리그.
그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스타들이 나타났고, 또 사라지곤 했다. 2005년 K리그 개막을 앞두고 우리는 K리그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스타를 잃게 됐다.

1992년 K리그에 데뷔한 이래 13년간 성남일화에서 활약하며, ‘성남의 영원한 주장’이자 ‘K리그의 전설’로 팬들에게 각인됐던 신태용(35세)이 은퇴를 선언한 것.

통산 401경기 출장(통산 1위)-99골(통산 5위)-68도움(통산 1위)에, 2003년 최초이자 아직까지도 유일한 ‘60-60클럽’달성까지 K리그에서 신태용이 거둔 성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에 성남에서 K리그 우승 6회, 컵대회 우승 3회, FA컵 1회, 수퍼컵 1회, 아시아클럽선수권 1회, 아시아 수퍼컵 1회, 아프로-아시아 클럽컵 1회, A3챔피언스컵 1회 등 수많은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신인왕을 비롯해 MVP 2회, 득점왕 1회와 함께 K리그 베스트11에도 역대 최다인 9회나 선정되는 등 K리그를 논할 때 ‘신태용’을 빼고 논할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뽐내던 신태용도 시간이 흘러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2004년 후반기부터는 선발멤버에서 제외되어 교체멤버로 뛰는 등 예전과 같은 지배력을 선보이지는 못해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태용의 갑작스런 은퇴가 팬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신태용이 여전히 ‘성남의 정신적 지주’라는 점과 여전히 팬들은 그가 1-2년 정도는 더 뛰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

여러 우여곡절 끝에 K리그 은퇴와 함께 호주의 퀸즐랜드 로어행을 결정한 신태용은 그 곳에서 2년 정도 선수 생활을 하며, 새로운 도전을 할 생각이다. 이후에는 축구의 본산인 잉글랜드로 가서 공부를 더 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13년간 변함없이 사랑을 나눠준 팬들, 무엇보다 은퇴 발표 후 1인 시위까지 하며 ‘신태용’을 위해 몸을 던졌던 팬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신태용은 K리그와 작별을 고했다. 다음은 지난 3월 15일 가진 신태용과의 고별 인터뷰.
(* 신태용 선수와의 인터뷰는 본 홈페이지 2003년 2월에도 3회에 걸쳐 게재된 적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 예전 인터뷰로 바로가기. )


- 이제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K리그 은퇴 및 호주진출로 가닥이 잡혔다. 현재 심경이 궁금하다.

정들었던 K리그 13년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새로운 도전의 길을 가기 위해 호주로 가게 됐다. 일단 국내 프로생활을 마감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쉽다.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고, 시원섭섭하기도 하고...그렇다.

- K리그 은퇴에 대해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성남 서포터 사이에서는 릴레이로 은퇴를 반대하는 1인 시위까지 했다. 마음이 더 아팠을 것 같다.

너무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신태용’이란 한 사람을 위해서 혹독한 한 겨울에, 자신들의 일까지 팽개치며 하루 월차를 내고 1인 시위를 해줬다는 것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고맙고, 가슴 벅차고, 가슴 속에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 눈물이 맺히곤 한다. 그 분들의 고마움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너무 고맙다.

- K리그 은퇴에서 호주진출까지의 과정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는가?


골을 넣고 환호하는 신태용 ⓒKFA 홍석균

가장 컸던 것은 아무래도 나이는 많은 반면 연봉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영을 해야 하는 구단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프로세계는 냉정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을 이해하면서도 너무 냉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처음엔 직접 구단으로부터 제외 통보를 받지도 못했다. “구단에서는 태용이를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핏 얼핏 흘러지나가면서 듣기는 했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통보는 안해줬다. 그러다가 12월말 경에서야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암담했던 것이 사실이다.

- 사실 기량으로 봤을 때 아직 K리그에서 뛸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남 외에 다른 구단에서라도 뛰고 싶다는 유혹은 느끼지 못했나?

물론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따지면 다른 팀에 가서 통산 100골, 70-70클럽 이런 기록을 세우고 보란 듯이 은퇴하고 싶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신태용’ 한 사람 때문에 월차까지 내면서 1인 시위하고 그랬던 분들을 봤을 때 내가 이렇게 성남을 버리고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성남 서포터 분들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면 다른 팀으로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시위해주시는 그 모습이 너무 고마웠고, 그 분들이 비록 수천, 수만명이 아닌 열 몇명 뿐이었지만 그 분들을 버리고 가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 지난 시즌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지난 시즌에는 예전과는 달리 수비형 미드필더의 성격이 강했다. 활동량에선 예전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최소한의 동선으로 노련하게 경기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았다.

우리 팀에서 김상식 선수가 군대에 간 이후 그 자리가 항상 취약한 포지션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나이가 있다보니까 경기를 보는 눈이 후배들보다 낫다고 차경복 감독님이 판단하셔서 “공격을 조금 자제하고, 중간에서 수비하고 리딩을 해줘라”고 주문을 하셨다.

여기에 두두 선수가 들어오면서 나와 포지션이 겹치다보니까 더 좋게 팀에 활용하기 위해서 내가 수비 쪽으로 많이 내려오게 됐다. 축구팬들은 “신태용이도 나이 먹으니까 밑으로 내려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주문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충실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지, 체력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축구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력과 구력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베테랑 선수들도 대접을 해줄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수비형 미드필더 쪽으로 옮기면서 익숙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실수한 것도 있겠지만, 내가 중앙에서 공수를 조율해주면서 좋게 이끌었던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 것은 조금 아쉽다.

- 지난해 10월 이후부터는 선발멤버가 아니라 주로 교체멤버로 나왔다. 성남을 상징하는 선수로서 어떻게 보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수도 있는데.

벤치 멤버라는 것을 처음 겪어봤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고, 그 상황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서 ‘아, 이게 인생살이구나. 그래 예전의 신태용이 아니라 지금의 신태용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차경복 감독님과는 정말 돈독한 사이인데, 감독님께서 나에게 직접 찾아와 등을 두드려주시면서 “진짜 미안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감독님, 저는 괜찮습니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전술적인 것은 감독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부분이니까 개의치 마시고 추구하시는 방향으로 가세요”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내가 항상 베스트로 게임을 뛴다는 것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베테랑으로서 은퇴해야한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 성남에서는 ‘신태용’이란 이름이 단순한 선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것이 오히려 팀이나 본인에게 부담이 된 거 같지는 않은지?

주위 분들도 그런 말씀들을 하신다. “신태용이 성남을 이끌고 6번 우승시키면서 구단 내에서는 코칭스태프보다 더 파워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었는데,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선수는 선수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 대신 내가 한 선수로서, 팀원 중 한명으로서, 또 주장으로서 코칭스태프를 보필해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거기에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있다보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13년 동안 한 팀에만 있으면서 여러 좋은 상들도 받고, 주장으로도 오래 활동하고 그러다보니 ‘성남하면 신태용’이라고 다들 생각하셔서 그렇게 된 것 같다.

- 성남 경기에서 본인의 모습에 자주 보이지 않자 성남 팬들이 “신태용!”을 연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 같다.


언제나 성남의 주장완장은 그의 몫이었다.
ⓒPhotoro


일단 기분은 정말 좋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리고 저 분들이 나를 이렇게 응원하는데, 내가 경기장에 들어가면 플레이로 그만큼 보답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더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신태용! 신태용!”하다가 “야 이 XX야! 들어가라”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웃음)

어쨌든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기쁘다. 누가 나를 찾아준다는 것은 진짜 기분 좋은 일이다.

- 흔히 성남 팬들은 “신 주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장완장은 몇 년이나 찬 거 같나?

음..정말 오랜 기간 주장완장을 찬 것 같다. 입단 후 3-4년차부터 주장 완장을 차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계속 달았던 것은 아니고 달았다가 대표팀에 나가면 선배님들에게 드리고, 다시 달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7-8년 전부터는 꾸준히 계속 달았다. 주장 완장이 없으면 뭔가 허전할 정도가 됐다.(웃음)
이상하게 내 성격상 주장완장을 달고 경기할 때 더 힘이 나는 것 같다.

- 초창기에는 선배들이 많아서 팀의 주장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일단 나는 경기장에 들어가면 리드를 해야 한다. 성격상도 그렇고, 포지션 상으로도 그렇다.
또 경기장 들어가서는 조금 죄송스럽긴 하지만 선배님들에게도 “형, 이렇게 해야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물론 경기가 끝나면 죄송하다고 인사를 드린다. 성격상 어쩔 수 없다.(웃음)

이런 것들로 인해 선배님들의 오해를 산적도 있었다. 팀이 이기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어떤 선배들은 오해해서 “후배 놈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랬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게 아니었구나 오해를 풀기도 하고...

-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팀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주장으로서의 카리스마 말이다.(웃음)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입단할 때부터 경기를 뛰고, 팀의 주축으로 활동했지만 그 당시에는 고정운, 이상윤, 하성준 선배, 사리체프 등 여러 선수들이 있어 내가 팀을 이끄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후 특별한 슬럼프 없이 꾸준히, 오랜 기간을 뛰다 보니까 지금 위치까지 오게 된 것 같다.

- 입단 초기부터 주장완장도 차고...그러고 보면 예전에 박종환 감독이 무척 예뻐하셨을 것 같다.(웃음)

알다시피 박 감독님께서 어느 한 선수를 예뻐하시거나 그것을 표현하고 그러시는 분은 아니지 않나. 그냥 볼 잘 차고, 열심히 하고 그런 선수들을 좋아하시는 거다. 그 분은 운동장에서 열심히 하는 선수들을 좋아하니까...
나 역시 일단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좋아하시지 않았나 싶다.


은퇴 선언 뒤 인사차 KFA를 방문, 조중연 부회장-노흥섭 전무-가삼현 대외협력국장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신태용 ⓒ스포탈코리아 이상헌


- 서서히 비슷한 연령대의 선수들이 은퇴를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주위 동기들끼리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의견교환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대학교 88학번들이 모인 88동기회가 있다. 한 40명 정도 되는데 내가 프로은퇴하면서 모든 회원들이 현역에서 은퇴하게 됐다. 그 모임이 1년에 2-3번 있는데 나가보면 전부 학교 지도자로 있더라. 프로생활은 내가 오래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나보다 훨씬 선배들이기 때문에 많이 조언해주고 그런다. 아직까지는 내 갈 길이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미지수다.

그리고 서정원이 동갑인데 얼마 전 오스트리아로 갔고, 이제 현역으로 남은 건 후배인 노정윤, 김도훈, 김병지, 김태영 이 정도인 것 같다.(웃음) 은퇴 결정 후 연락 와서 위로도 해주고 그랬다.

- 유독 한국에서는 팀의 레전드급 선수들의 마지막 축구인생이 항상 구단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쓸쓸한 퇴장으로 이어진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도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너무 아쉽다. 선수에 대해서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주고, 베풀 것은 베풀어주고 그래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마케팅 정책 부재라고 생각한다. 명문구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팀에 큰 영향을 끼친 선수에 대해 대접을 해줘야만 그것이 모태가 되어 이 다음에도 다른 좋은 선수들이 나와도 그 전통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프로축구단이 공통적으로 마케팅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과 관련 있다고 본다. K리그를 누비던 스타들이 시간이 지나면 팬들에게 그냥 잊혀져버린다. 잊혀지기 전에 한 번 더 각인시켜줘서 이들의 마지막이 팬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세월이 지나 그 팀의 전설적인 OB선수들이 모여 행사도 하고 자선경기도 할수 있다. 그럴 때 팬들이 같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이고...


K리그를 호령했던 신태용 ⓒKFA 홍석균

- 신태용 선수의 프로활동을 보면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먼저 처음 데뷔해서 3연패를 달성했을 때, 그리고 2001년부터 다시 3연패했을 때의 팀을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처음 3연패를 했을 때(1993년 ~ 95년)는 선수 구성으로만 보면 3연패할 수 있는 멤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는 선수들이 내 몸을 던져서, 골이 들어가면 내가 죽는다는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3연패를 달성할 수 있었다.

2001년에 우승할 때도 우승할 수 있는 멤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우승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을 선수들에게 접목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02년, 2003년이야 최고의 멤버 아니었겠나. 그래서 쉽게 우승을 할 수 있었다.

두 팀을 비교하긴 그렇고, 일단 박종환 감독님이나 차경복 감독님이나 두 분 다 스타일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비슷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성남의 6번 우승에 모두 공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성남 엠블렘에 별 6개가 새겨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모두 소중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 있다면.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역시 1995년 3연패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포항과의 챔피언 결정전은 정말 대단했다. 동대문경기장에서 열렸던 1차전 때는 대표팀에 가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뛰지 못하고 본부석에서 경기를 봐야했다. 포항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허리가 다 낫지 않아서 전반에 벤치에 있었는데, 0-2로 지고 있었다.

그 때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이번에 우승 못하면 MVP 또 못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웃음)
93년과 94년에는 (고)정운이 형과 (이)상윤이 형이 MVP를 수상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받을만 했기 때문이다.(웃음) 그런데 당시 포항 가서 선제골을 내주면 한번도 못이기는 징크스까지 있었던 터라 답답했다.

박종환 감독님이 전반 끝나고 “허리 괜찮냐? 한번 뛰어볼래?” 물었다.
그래서 뛰겠다고 그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뛰어보고 지든지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들어가서 내가 2골을 넣으면서 2-2로 만들었고, 마지막에 정운이 형에게 패스해줘서 3-2로 역전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1분을 남겨놓고 라데에게 헤딩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다. 정말 명승부였다. 아마 그 경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근래 들어 리그에 젊은 선수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 선수들에게 관심이 많이 집중되는 것이 사실이다. 리그의 베테랑으로서 이것을 지켜보는 느낌은 어떠한가?


2002년 우승 후 샴페인을 터트리며 기뻐하는
신태용 ⓒ베스트일레븐


내 위의 선배들이 없었으면 나도 이 자리에 없었고, 내가 이 자리에 없었으면 후배들도 없다. 그런데 지금 언론들이 너무 인기에 연연해서 한 두 선수에만 포커스를 맞춰 그 선수들이 모든 프로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은 잘못된 것 같다.

관심이 너무 일부 선수에게만 치우치니까 웬만한 선수들은 그냥 잊혀져버린다.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기사거리 아닌가.

- 정말 오랜 기간 ‘축구’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는 젊은 선수들을 볼 때 베테랑만이 감지할 수 있는 ‘이 선수는 괜찮겠다’는 감이 있을 것 같다. 혹시 최근에는 그런 것을 느껴본 선수가 있는가?

음..최근 어린 선수중에서 살펴보면 박주영이는 크게 성장할 선수다. 그리고 김승용이도 볼을 찰줄 아는 것 같다. 백지훈이도 경기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참 좋은 선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으로 건너간 김진규, 이 선수도 충분히 크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성남 내에서는 김철호나 전광진 같은 선수가 조금만 더 세밀하게 다듬으면 대표급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선수들이 계속 나온다는 것 자체가 한국축구를 위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 성남팬들은 김철호를 ‘신태용의 후계자’로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기대할 만한 선수다. 다만 철호를 위해 조언을 한다면 성격을 조금 바꿔야 한다.
나와 룸메이트였는데, 항상 느긋하고 착하다. 물론 성격으로 볼 때에는 나쁜 게 아니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달라져야 한다.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 하는 식의 강한 투쟁심이 필요하다. 철호는 너무 착하다보니까 경기장 안에서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어느 선까지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전사와도 같은 강인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 어떻게 보면 K리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에 가장 잘 맞는 선수였다고도 생각된다. 혹시 비슷한 유형의 선수 중에 경쟁심을 가졌던 선수는 있는가?

사실 경기를 하다보면 모든 선수가 다 라이벌로 느껴진다. 어느 한 선수 쉽게 생각하지 않고, 어느 팀의 어느 후보선수라 할지라도 경기장 안에서 맞붙으면 긴장감을 갖고 상대한다. 내가 강하게 보여도 마음 속으로는 ‘저 선수 나오면 내가 어떻게 볼을 차야할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정신력이 더 살아난다. 상대를 얕보는 것은 정신적으로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나와 비슷한 유형을 꼽는다면 윤정환이나 노정윤, 고종수 같은 선수를 들 수 있는데, 이 선수들과 부딪힐 때마다 항상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이 친구들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이런 경쟁을 통해서 내 자신을 다잡는 것이 내 방식이다.


성남 우승의 현장에는 언제나 신태용이 있었다. ⓒ베스트일레븐

- 코너킥을 차러갔을 때 상대 서포터가 물병을 던지자 그것을 주워 마시고는 그 서포터에게 박수를 보낸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거다. 자기 팀을 워낙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넓게 보면 함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서로 가슴에 못 박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애가 두명 있는 아버지인데, 나보다 훨씬 어린 조카뻘 되는 사람들이 “야! 이 XX야” 하면서 입에 담기 험한 말을 하고, 물병을 집어던질 때는정말 보기 안 좋다.

그렇게 되면 축구가 좋아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경기장에 오는 부모님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되겠는가. 이것은 미래의 축구팬들마저 없애는 행동이다.

물론 자신의 팀이 이기기 위해서 응원하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매너는 지켜야한다. 팀이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뛸 수 있게끔 독려해주는 것까지가 팬들이 할 일이다. 그런 것이 진정으로 자기 팀을 사랑하고, 축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 물병이 날아왔을 때 내가 화를 내고 그 사람에게 같이 손가락질하고 욕을 했다면 상황은 더 악화됐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박수를 쳐주면서 그 물병 던지고 욕한 사람이 뭔가 느끼기를 원했다.

이것은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운동장에서 후배들이 선배한테 욕하고 그러는 것을 절대 못 본다. 우리 팀 선수들이 상대팀 선배에게 욕하는 것도 못 봐준다. 축구를 하면서 상대에게 거친 태클이나 몸싸움이 들어갈 수도, 아니면 자신에게 그런 태클이나 몸싸움이 들어올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거칠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축구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축구 선배는 어디에 가든 또 보게 된다. 축구와 관련되지 않는 욕설 등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그러고 보면 유난히 팬들에 대한 배려가 많았던 것 같다.

팬들이 없는데 축구선수가 있을 수 있나? 같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축구인들과 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만 축구가 더 많은 발전을 할 수 있다.

예전에 올스타전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상암경기장에서였을 것이다. 코너킥 기회에서 오른발로 킥을 하려고 하는데, 관중석에서 “신태용 선수! 왼발로 차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왼발로 차줬다.(웃음)

올스타전은 그야말로 팬들을 위한 경기 아닌가. 팬들이 왼발을 원하면 왼발로 차주는 것이 당연하다. 승패를 떠나서 같이 즐기자고 하는 경기이니까...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아들과 함께 ⓒKFA 홍석균

- 이제 호주 이야기를 해보자. 호주 퀸즐랜드 로어팀과는 어떤 인연으로 계약을 맺게 됐는가?

원래 한국에서 은퇴를 하려고 했는데, 호주 브리즈번에서 축구학교를 하고 있는 (김)판근이 형이 “올해부터 호주에서 프로리그가 정식 출범하니까 한번 와서 뛰어봐라. 너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형, 저는 나이도 있고, 또 호주는 영국식 축구라서 힘있는 축구를 하는데 제가 가능하겠습니까?” 했더니 “충분히 할 수 있다. 해봐라”고 하셔서 우연찮게 일이 진행됐다. 그리고 1월 말에 호주에 가서 직접 2경기 정도 뛰기도 했고..

그 팀 감독님이 한국 선수들을 좋아하셔서 전격적으로 가게 됐다. 사실 이번 호주 행은 여러 가지 길을 모색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잘하겠다는 것보다는 선수로 뛰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도 적응해보고, 무엇보다 영어를 빨리 배우기 위한 것이 크다.

- 이번에 서혁수도 같이 가게 됐는데.

그렇다. 좋은 선수이고, 잘 알고 있는 선수이기에 추천했다. 지금 은퇴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선수라고 생각했다. 좋은 실력을 갖고 있어도 운이 맞지 않으면 안 풀릴 수가 있는데, 성남에서의 서혁수가 그랬다. 호주에서의 테스트에서도 잘했고, 함께 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가 가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최근 호주가 AFC에도 가입하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아시아와의 교류도 더 많이 늘 것이고, 우리가 그 발판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호주에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예전에 잉글랜드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선수생활이 끝나면 호주보다는 영국 쪽으로 가고 싶다. 호주에서 2년 정도 선수생활을 하면서 귀와 입이 어느 정도 뚫리면 영국에서 부딪치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계속 축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에 대한 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호주보다 한 단계 위인 영국에서 부딪쳐보는 것이 나에게도 큰 경험이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신태용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탈코리아 이상헌

- 13년간 프로무대에서 뛰었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아쉬웠던 순간 등이 있는가?

모르겠다. 정말 긴 세월이었다.
먼저 슬펐을 때는 94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을 때, 그리고 97년에 대표팀에서 탈락했을 때인 것 같다. 그 때는 정말 가슴 아팠다. 또 97년에 발목 연골이 닳아서 선수생명을 끝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많이 힘들었다.

반면 우승할 때는...해마다 우승할 때 그 기분은 항상 다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시합을 이기고, 우승컵을 손에 넣었을 때는 모든 힘든 것들이 다 잊혀진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기쁨을 맛본 선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웃음)

- 훗날 한국에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가?

'신태용이 정말 신사가 됐구나. 운동 선수도 저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꼭 지도자가 되겠다,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는다. 일단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까 그 곳에서 뭔가 새롭게 내가 변해서 와야겠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는 사업가로도 변할 수 있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목표로 지도자의 길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 밖에 다른 분야를 생각할 수도 있고...여러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상태다.

- 축구팬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지도자의 길로 들어오길 바랄 것이다.(웃음)

내가 축구로 이렇게 컸고, 축구밖에 모르고 살았지만 내 인생에 있어 축구 외에 어떤 자질이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만약 선수 시절보다 지도자가 더 자질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면 지도자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이다. 어쨌든 인간 신태용에게 있어 최고의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 마지막으로 ‘축구선수 신태용’을 오랜 기간 꾸준히 지켜봐온 팬들에게 인사를 해달라.

팬들에게는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생각지도 않게 2005년 초에 은퇴를 발표하게 되면서 K리그 그라운드에 설 수 없게 되어 팬들에게 죄송스럽다. 저를 사랑하는 팬들도 아쉽게 생각하겠지만, 당사자인 나 역시도 아쉽고, 죄송스럽고 그렇다.

그러나 신태용은 죽지 않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 곁에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때 더 많은 박수를 보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 믿고 해외에서 더 열심히 내 길을 찾는 노력을 할 것이고, 그 길을 발견해서 돌아오겠다.

- 그 동안 K리그를 지켜줘서 고맙다. 부디 좋은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신태용 프로필

0 생년월일 : 1970년 10월 11일
0 키, 몸무게 : 175cm, 70kg
0 출신지 : 경북 영덕
0 출신교(팀)
대구공고 - 영남대 - 성남(천안) 일화(1992년 ~ 2004년)

0 K리그 경력
- 1992년 K리그 신인왕
- 1995년 K리그 MVP
- 1996년 K리그 득점왕
- 2001년 K리그 MVP
- 시즌 베스트 11 : 총 9회. 1992년 - 1996년, 2000년 - 2003년
- 우승 : K리그 우승 6회(1993년 - 1995년, 2001 - 2003년)
FA컵 우승 1회(1999년)
아시아 클럽 선수권 우승(1995년)
A3 챔피언스컵 우승(2004년)
- 출전 시즌 : 1992년 - 2004년까지 총 13시즌
- 통산 출전 경기 : 401경기
- 득점 : 99골
- 도움 : 68개
- 실점 : 2골
- 반칙 : 576개
- 슈팅 : 755개
- 경고 : 30회
- 퇴장 : 3회

0 국가대표 첫 발탁 : 1993년 3월
0 A매치 데뷔 : 1993년 3월 9일 친선경기 캐나다전(장소 캐나다)
0 A매치 마지막 경기 : 1997년 5월 21일 친선경기 일본전(장소 일본 도쿄)
0 A매치 통산 기록 : 21경기 3득점
0 주요 국제 대회 참가 경력
- 1987년 세계 청소년(U-16) 대회 (캐나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 본선
- 1995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 1996년 아시안컵 (UAE)


인터뷰=이상헌
2005-03-25
출처 : K리그의 거인’ 신태용, 13년간의 전설을 마감하다..
글쓴이 : 이병모2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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