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1080-성남FC

[스크랩] 이탈리아 축구의 모든것

비탈- 2007. 5. 16. 14:49

< 세리에-A 18개팀 >



서론. 1. 이탈리아 축구

1-1.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적 배경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14세기에 칼치오(calcio:'공차기'라는 뜻) 경기가 행해졌는데, 이 경기는 정기축제 기념경기로 행해졌다. 또한 중세 유럽에서는 멜레(melee) 또는 멜라이(mellay)라는 경기가 널리 행해졌는데, 동물의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공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형태의 경기였다. 경기 방식은 시나 행정구에서 선발된 양 팀 선수들 100여 명이 양 팀의 중앙 지점에서 경기를 시작하고, 자기 팀의 지역 경계선을 골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남부유럽 발칸반도의 이탈리아는 12세기 때부터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Comune)로 조직되었고, 이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까지 지배하면서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만의 도시국가형태는 1871년 빅토리오 에마뉘엘레 2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전까지 끊임없는 전쟁과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었다. 비록 통일이 된 지금에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있어 축구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닌 도시와 도시의 대항전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각 연고간 축구클럽의 경기가 도시간의 대리전쟁(代理戰爭)의 개념으로 바뀌었고, 홈팀에 대한 애정도 이런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역사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도시간의 경기가 열릴 때면 선수는 물론 팬들도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과도한 열기에 휩싸인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이탈리아의 축구문화의 여러 분야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첫번째가 도시간의 축구게임에서는 꼭 이겨야한다는 신념이 만들어낸 이탈리아 축구의 대표적 포메이션인 '카테나치오'이다. 1960년대에 나타난 '카테나치오'란 전술은 이길 수 없어도 최소한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전이었고, 이 포메이션은 지금껏 이탈리아의 대표적 수비체계 2-3-5system으로 고수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가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광적으로 응원하는 이탈리아 축구 팬들이다. 이탈리아 축구팬들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2. 이탈리아 프로축구 - "세리에-A"

이탈리아는 역대 2회와 14회 월드컵대회를 개최하고 월드컵 우승 3회의 저력을 가진 축구의 강국이다. 이 같은 저력은 단지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있다고 해서, 또는 1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축구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룰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이런 이탈리아의 축구의 저력 뒤에는 꿈의 리그라고 부르는 "세리에-A(Serie-A)"가 있다. "축구의 꿈은 Serie를 향한다"라는 말처럼, 남미와 함께 세계 축구계를 양분해 이끌고 있는 유럽에는 남미, 아프리카, 심지어 아시아의 축구 스타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세계 축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축소판'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유럽 가운데서도 최고의 축구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남부유럽 발칸반도의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축구 리그의 역사는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893년 시작된 이탈리아 리그는 각 지역별로 나눠 운영되다가 1929∼1930시즌을 맞아 '세리에A'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리그로 통합돼 현재의 틀을 갖췄다.

세리에A는 1·2차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왔다. 98∼99시즌까지 97차례 우승팀을 탄생시킨 세리에A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영광을 차지한 팀은 토리노에 연고를 둔 유벤투스다. "축구장은 이탈리아, 투우장은 스페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도시 어디에나 스타디움이 있다. 훌륭한 선수와 훌륭한 경기장. 이런 완벽한 인적(人的) ·물적(物的) 인프라의 지원속에서 이탈리아 프로축구는 유럽의 빅리그 가운데에서 단연 톱으로 꼽히는 것이다. 잉글랜드,스페인,독일,프랑스와 함께 빅 5로 분류되지만 이탈리아 프로리그의 빠르고 폭발적인 성장은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프로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그동안 이탈리아에는 마라도나를 비롯해 굴리트,반바스텐,마테우스,클린스만 등 내로라 하는 톱스타가 다녀갔고, 98·99년 FIFA 올해의 선수 연속 수상, 98프랑스월드컵 MVP에 선정된 브라질의 호나우도(인터밀란), 99∼2000시즌을 앞두고 사상 최고액인 5천만달러(약 600억원)의 이적료로 라치오에서 인터밀란으로 팀을 옮긴 복서 출신의 이탈리아 골잡이 크리스티안 비에리, 98프랑스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지네딘 지단(유벤투스) 등이 모두 이탈리아 프로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축구의 재미를 위해 구성된 "다국적군"인 셈이다. 비에리를 비롯해 아모로소(파르마) 베론(라치오) 셰브첸코(AC밀란) 등 7명이 99년 '세계 이적료 10걸'에 포함된 것은 이탈리아 축구시장의 규모와 인기가 얼마나 큰지를 잘 말해준다. 그래도 적자가 나지 않고 그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입장수익과 TV중계권,스폰서,광고 등의 수입이다. 이익을 낼 수 있는 매체가 무궁무진한 축구는 영원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순히 기업의 홍보차원에서 매년 수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프로축구클럽들이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부분이다.

이탈리아리그가 잘 운영되는 또 다른 증거는 1부리그 참가팀수의 증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타 유럽국가에서는 리그전 참가팀 수를 줄이는 가운데서도 이탈리아리그는 전 세계 축구리그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활성화된 리그다.

그 이유를 꼽아본다면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축구쇼 때문일 것이다. 관중은 훌륭한 경기를 보기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으며,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고 수익을 남기는 것이 프로클럽의 목적이자 의무라는 것을 이탈리아의 프로팀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세리에-A"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아보고자 한다. "세리에"는 "시리즈"라는 뜻으로 리그방식은 홈엔드 어웨이 시스템(Home & Away System)으로 34게임씩을 치러 순위를 가린다. 승리팀은 3점, 무승부팀은 승점 1점으로 점이 주어지고 경기는 악천후나 돌발적인 사태로 인해 도저히 경기를 할 수 없는 예외사항이 아니면 평일이나 토요일에는 게임을 하지 않고 일요일에만 경기를 한다. '아주리(Azzuri)' 이탈리아 대표팀의 스케쥴은 국내리그전에 영향을 주지않도록 일요일에는 경기가 없다. 이탈리아 축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축구전용구장이 클럽소유가 아닌 시(市)와 주(州) 소유라는 점이다. 유명한 밀라노의 주세페 메차 스타디움은 AC밀란과 인테르 두팀이 홈그라운드로 공동 사용하고 있으며, 로마의 올림픽 스타디움도 AS로마와 라지오가 홈구장으로 같이 쓰고 있다.



1-3. 이탈리아 축구 발전원인

본론에서 알아볼 이탈리아의 프로축구 발전원인을 우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앞에서 언급한 경기장시설 같은 물적인프라와 유명한 선수를 수입해 구축할 수 있는 인적인프라는 돈, 즉 그것을 충족시켜줄 비용만 있다면 일류의 시설과 일류의 선수들을 갖출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여 전용구장을 건설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우리도 이탈리아처럼 훌륭한 축구경기장을 가질 수 있을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비용과 축구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탈리아의 격언에 "칼치오는 돈"이라는 것이 있다. 돈이 있어야 축구판이 흥행하고 또 축구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축구에는 아직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리고 경험하지 못했던 두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광적인 팬들의 응원과 축구복표라 불리우는 "ToTo calcio"의 존재였다. 광적인 응원은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와 비교할 수 있고, 축구복표는 이제 우리도 내년 9월부터 시행한다고 하니, 이탈리아 축구를 통해 그것들에 대해 조금은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본론 1. 이탈리아 축구발전의 배경

1-1. 울트라(Ultra)

울트라(Ultra)는 유럽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프랑스 남부, 그리고 발칸 반도등 지중해 연안의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이 울트라들은 서포터 중에서도 특히 정치색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울트라' 라는 말 자체가 정치용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축구장에 울트라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68년 AC밀란의 서포터조직 'La Fossadei Leoni'(이탈리아어로 '세 마리 사자의 굴'을 뜻함)가 조직되면서부터이다. 전통적으로 밀라노에 자리잡은 두 팀, 인터밀란과 AC밀란은 특정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인터밀란이 주로 우파성향의 중상류충 지지를 받은 반면 AC밀란은 좌파성형이 강한 젊은 노동자층이 주를 이루었다. 자연히 이런 배경에서 조직된 서포터들도 그 성향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혼란한 당시의 경우 노동자층이 주를 이룬 AC밀란의 서포터들은 각종 총파업이나 반체제 시위 등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노조나 조그만 정치 모임 등으로 이미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있었고 집단행동에 훨씬 익숙해있는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 영국의 서포터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도 저런 형태의 조직화된 응원을 하기로 한다

이들은 영국처럼 골대 뒤쪽의 꾸르바(curva,구역)을 차지하고 90분 내내 서서 응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영국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울트라(Ultras)라 불리는 극좌파들이 군복형태의 통일된 옷을 입고 양철북에 맞춰 구호를 외치며 반체제시위 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포터들이 이런 모습을 축구장에서 그대로 재현했던 것이다. 시위대처럼 엠블렘을 부착한 통일된 군복에 역시 시위대처럼 북박자에 의해 구호를 외치며 응원을 하는 과정에서 정치구호가 응원구호로, 당기(黨旗)가 응원기로 서서히 바뀌었고, 점차 영국과는 전혀 다른 응원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통일된 복장에(비록 유니폼은 아니었지만) 골대 뒷자리에 서서, 북박자에 의한 유도되어지며 현란한 각종 깃발과 현수막을 내세우는 이런 응원형태는 꾸르바(Curva) 서포트 흑은 울트라 서포트로 불리며 점차 다른 구단에도 전파되어 간다. 같은 해 인터밀란의 'Inter Boys', 볼로냐의 'The Red and Blue Commandos'가 생겨났고 마침내 1971년 삼프도리아의 서포터들이 자신들의 명칭을 아예 'Ultras'로 정하면서 오늘날 쓰이는 울트라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이 울트라 문화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스페인, 그리스, 발칸 반도 등에 퍼져갔고 오늘날 영국과 더불어 서포터 문화의 커다란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의 국가대표서포터 울트라 니폰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울트라'.도 이탈리아의 울트라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2. 훌리건

이런 광적인 응원문화는 훌리건이라는 또 다른 서포터스를 만들어냈다. 훌리건을 서포터라고 부르는데 있어 약간의 무리는 있겠지만, 훌리건의 뿌리는 서포터스까지 분명히 거슬러 올라간다. “60년대 유럽의 과격한 서포터스 일부가 훌리건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서포터스 문화가 활성화될수록 훌리건에 대한 경계심이 필요하다고 많은 축구관계자들은 말한다.

지금은 훌리건(hooligan·무뢰한, 불량배)이 하나의 일상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이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역사는 의외로 짧다. 옥스퍼드 대학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 단어가 쓰인 것은 1898년 영국의 한 조간지에서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Hooley's gang'이 와전되면서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고 아일랜드 출신으로 악명 높았던 깡패 'Houlihan'家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비숫한 시기에 슬라브어와 러시아어에서 같은 단어가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이 단어가 동유럽에서 생겨나 영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축구장에 본격적으로 훌리건이 등장한 것은 80년대초. 영국 보수당정권하에서 사회복지축소,빈부격차심화에 반발한 실업자와 빈민층이 축구장에서 울분을 폭발시키는 일이 잦아지면서 축구장의 난동꾼들을 훌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유래가 어찌되었든 원래 이 훌리건은 축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그저 거리에서 싸움을 일삼는 불량배나 깡패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축구장 폭력이 점점 기승을 부리게 되자 축구장에서 난동을 일삼는 무리들을 지칭하는 오늘날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축구장에서의 폭력 사건은 존재하던 것이 현실이었으나 그 규모가 비교적 작고 간헐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폭력이 거대화되고 과격해지는 시기는 유감스럽게도 1963년 리버풀의 더 콥(The Kop)을 시작으로 조직화된 서포터들이 등장하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게 된다. 1960년 당시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축구 팬들의 원정응원이 막 피어나는 시기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원정 팬들과 홈 팬들간의 충돌도 빈번해졌다. 원정 온 팬들은 무리를 지어다니며 이 들중 몇몇은 점차 상대 팬들을 공격하거나 경기장 근처의 거리를 활보하고 기물들을 마구 파괴했다. 이러자 축구장의 폭력문제는 서서히 축구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들어서 런던의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청소년 문화인 Skinheads가 등장한다. 극우성향에 완전히 밀어버린 머리, 통일된 복장으로 폭력을 일삼는 이들이 축구장에 모습을 나타나게 되면서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훌리건'이라는 개념이 자리잡는다. 이들은 극우파를 지지하는 각종 티셔츠나 현수막등을 내걸고 투견(鬪犬)이나 무기등이 그려진 엠블렘으로 자신들을 상징하며 '영국 국기에 검은색은 없으니 검둥이 들은 꺼져라(There are no black in the Union Jack, so send the niggers back)'등 유색 인종의 선수들을 비난하는 응원가를 부르며 이들을 향해 오물을 던지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각종 행패를 부렸다. 이와 함께 폭력의 정도도 점차 심해져 칼이나 쇠 파이프같은 무기가 등장하고 사상자까지 생기자 경기장에는 경찰들이 늘어나고 언론은 일제히 훌리건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훌리건들은 이런 비난에 상관없이 오히려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그 수가 늘어만 갔다.

1980년대 들어서 리버풀과 런던의 훌리건들을 중심으로 '케쥬얼(Casuals)'이라 불리는 새로운 훌리건 세력이 등장한다. 이전의 훌리건들이 노동자 중심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중류 계층으로 고급메이커의 옷만을 입으며 이전의 훌리건들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케쥬얼 훌리건들은 각 도시의 디스코텍등을 중심으로 모여 축구장 폭력뿐만 아니라 마약 같은 각종범죄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는데 이러자 훌리건은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잡는다.

이렇듯 훌리건에 대해 살펴본 것은 그 문제가 훌리건의 유래와 부작용이 결코 영국이라는 나라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라는데 있다. 최고의 프로리그를 보유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그 인기만큼이나 '훌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이탈리아는 이 "훌리건"에 대해서 잊지못할 비극적인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나라가 되었다.

1970∼80년대 훌리건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문제가 많았던 영국 축구였지만 그 성적은 유럽 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특히 리버풀은 1973년과 1976년 두 번의 UEFA컵을 시작으로 1977년, 1978년, 1981년, 1984년 챔피언스컵을 4차례나 차지하는 등 한마디로 눈부신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다음해인 1985년 챔피언스컵 결승에 오르고 중립국 원칙에 의해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의 헤이셀(Heysel)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와 경기을 치루게 된다. 유럽챔피언을 가리는 중요한 경기답게 양 팀에서는 많은 원정단이 벨기에로 들어왔는데 이중에는 리버풀을 추종하는 훌리건 세력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립 본토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싶다는 우월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울트라(Ultras)들에 대한 라이벌의식, 1984년 리버풀의 팬들이 이탈리아 팬들에게 공격당했었던 사건 등이 여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85년 5월 29일. 전세계 4억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럽의 챔피언을 가리는 경기는 시작되었다. 이미 전날부터 브뤼셀 시내는 영국훌리건들과 이탈리아 울트라간의 패싸움, 약탈, 방화 등으로 몸살을 앓은 후였고 이 때문에 많은 경찰들은 여기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이는 정작 경기장에 투입해야 할 경찰의 부족으로 이어져 게이트에서는 검문검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많은 훌리건들이 쇠파이프와 몽등이, 칼 같은 무기를 소지한 체 경기장에 들어오는 결과를 낳는다. 원래 두팀의 팬들은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골대 뒤에 자리잡게 되어 있었지만 많은 표가 암시장에 흘러들면서 중앙의 중립지역에도 상당수의 유벤투스 팬들이 앉게 되자 문제는 발생한다. 훌리건들은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이탈리아 팬들을 표적으로 삼았고 얼마 후 일제히 쇠 파이프와 몽둥이를 든채 중립지역을 향해 돌진했다. 이들이 유벤투스 팬들은 물론 일반 관중들도 무차별 폭행하자 스타디움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관중들은 서로 먼저 피하기 위해 일제히 통로쪽으로 몰리자 이 과정에서 스타디움 한쪽에 자리잡은 7미터짜리 콘크리트 벽이 붕괴되었다. 결국 밀집된 지역에 거대한 벽이 무너지자 많은 사람들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는 참극이 일어난것이었다. 결국 이 사고로 39명이 목숨을 잃고 454명이 부상을 입는 참담한 결과가 발생하였다. 벨기에 경찰은 사건의 주동자인 훌리건 26명을 구속했고 유럽축구협회(UEFA)는 향후 5년간 모든 영국 클럽들의 유럽대회 참가를 금지시킴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광적으로 승리에 대한 집착이 보여준 참혹한 현실이었다.



본론 2. ToTo calcio

2-1. ToTo calcio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우리 국가대표 축구선수단의 국가대항전 때 주위 사람들과 경기 스코어를 알아 맞추는 내기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내기에 걸린 액수가 얼마인가에 상관없이 모두 우리 국가대표팀이 이기기를 바랬겠지만, 그 내기 또한 경기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험을 우리는 많이 했을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탈리아 축구의 흥행에 큰 공헌을 한 한가지 아이템(item)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을 축구로 끌어들이는 큰 요인 중 하나가 축구복표사업이다. 우리나라도 2001년 9월부터 축구복표사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 축구복표사업이야말로 이탈리아인들을 그토록 축구에 열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54년의 노하우를 가진 이탈리아 축구복표사업을 조사해보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매주 ‘토토칼초(ToTo calcio)’란 축구복표를 발행한다. 매주말 경기결과에 따라 당첨자를 가리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강팀이 약팀을 ‘당연’하게 이기면 배당이 적지만 이변이 일어나는 주에는 당첨자가 줄어드는 반면 이때 당첨된 사람은 일확천금을 쥐게 된다. 휴일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우리나라 경마장의 마권이나 경륜의 복표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이런 경기에 대한 승부이외의 부가적인 요소가 축구복표의 매력이고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축구에 빠져드는 요인이 된 것이다.

물론 다른 유럽의 국가에도 이런 축구복표가 없는것은 아니다. 사실 축구복표는 1923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의 Pools, 스페인의 Quiniela, 독일의 Toto, 이태리의 Toto Calcio, 포르투갈의 Totobola, 프랑스의 Loto Foot가 있다. 참고로 남미는 브라질의 Loteca, 아르헨티나의 Prode, 멕시코의 Progol,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만이 축구복표을 도입하고 있다. 이런 다른 여러국가의 복표사업중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축구를 세계적인 시장으로 성장시킨 숨은 원동력이 바로 이 이탈리아 축구복권 ‘토토칼초(TOTO CALCIO)’인것이다.

'토토칼초'라 불리우는 축구복표는 이미 이탈리아 축구팬은 물론 일반대중에게도 널리 친숙해져 있는 복권사업으로, 토토 칼초는 이탈리아 정부가 1946년 세계 대전 후 축구의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축구 복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2차대전 후 올리픽 참가비용을 구하기 위해 내세운 고육지책이었지만, 이 사업으로 인해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가 60년 로마 올림픽의 운영 자금을 토토칼초 수익금만으로 조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 축구복표의 배팅방식은 매주 일요일 주최측이 지정한 경기의 점수 차이를 맞추는 것에 50리라를 걸고 참가할 수 있다. 이탈리아 프로리그 13경기의 승, 무, 패를 추리해 두 가지 경우에 1,600리라(한화 약 1천원)이상을 걸고, 전경기를 적중한 1등과 12경기에 적중한 2등에게 당첨금이 지급 되는데, 1등의 당첨확률은 약 160만분의 1이고, 또한 94년엔 가장 골이 많이 터진 8경기를 맞히는 '토토골' (당첨확률 약 1,100만분의 1), 98년엔 6경기의 스코어를 맞히는 '토토세이'(당첨확률 약 1,700만분의 1)도 시작됐다.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앞에서 잠깐 예를 든 우리가 흔히 하는 축구경기의 승부를 알아맞추는 게임인 것이다. 비록 낮은 확률의 복표임에도 불구하고 "토토칼초"가 이탈리아 축구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온상이 되어 온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2. ToTo calcio - 도박인가?

우리나라도 이 축구 복표 사업을 추진하려 하고 있는 이때, 사회일각에서는 이미 도입이 가시화 된 축구 복표 사업에 대한 우려와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축구복표에 대한 반론은 축구복표사업이 엄연한 의미에서 도박의 일종이라는 것이 논점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과연 축구복표사업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행하는 도박인가? 복표사업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범국민적이고 전국적인 도박과 사행성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축구 팬의 상당수가 청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고, 이런 이유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청소년의 복표구매행위를 금지하려는 입법안을 통과시키려하고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도 이 축구복표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정도라고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에 축구복표는 단순한 사행성 도박이 아니며, 또한 기존의 다른 복표들과도 확실히 구별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미성년자도 자유롭게 축구복표를 구입할 수 있다. 지금 일본과 한국이 축구 복표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청소년 보호를 위하여 구입연령을 제한하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토토칼초 구입에 따로 연령제한이 없는 이탈리아는 단지 18세미만 청소년의 경우 당첨금을 받기 위해서 보호자의 동반을 요구할 뿐 언론에서조차 청소년 문제로 확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98년 허가된 스포츠복표 '스코메세(유럽각국의 리그 등 각종 프로스포츠가 대상)'는 18세미만의 구매가 금지돼 있는데, 여기에 이탈리아인들의 토토칼초에 대한 생각이 집약돼 있다. 바로 토토칼초는 지적 게임이라는 것이다. 각팀의 정보를 모아 경기결과를 추리하는 오락이라는 것이다. 반면, 스코메세는 사행성이 높아 카지노와 경마와 같아서 연령제한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일반 복표-마권이나 주택복권-는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사전지식도 요구하지 않고 단순히 손에 쥐어지는 대로 100%운에 맡길 뿐이지만, 이 축구 복표의 경우는 철저하게 각 팀에 대한 전력과 선수들의 컨디션 등을 분석해야 하고, 심지어는 며칠 뒤의 기상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축구경기의 경우, 가령 비가 온다하더라도 경기는 취소되지 않으며, 이러한 수중전 상황에서는 분명히 실력 이외의 다른 변수들이 상당히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축구에 정통할수록, 또 축구 전반을 망라하여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할수록, 각 팀의 전력에 대한 지식이 많을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 과학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런 축구에 대한 열정이 오늘의 이탈리아 축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의 복표 종류가 너무 많다는 것도 큰 문제라는것이 반대론의 입장이다. 주택복권,기술복권등 지금도 잘 안 팔리는 복표을 계속 만들어내다보면 기금마련이라는 본래 의 목적보다는 판매경쟁에 의한 경쟁 비용만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토토칼초의 총괄을 담당하는 이탈리아 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95년 약 3조리라(한화 약 1조9천5백억원)에 달했던 매출액이 이후 계속 하락하더니 급기야 1999년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탈리아 올림픽위원회는 배당금이 높은 후발 복권 주자에게 인기를 빼앗긴 점과 올 시즌 들어 변경된 리그전 진행방식을 거론하고 있다. 이른바 '숫자 맞추기'식(式) 복권인 '스펠테라트'는 작년 2월 8백57억리라(한화 약 6백84억원)의 배당금도 당첨된 바 있어 93년 53억리라가 역대 최고 배당금인 토토칼초 보다 무려 17배나 많은 엄청난 액수를 기록하면서 토토칼초의 판매가 급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요일 개최가 원칙이었던 세리에A는 올 시즌 들어 텔레비전 중계 횟수를 늘려 방영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송사들의 전략 때문에 9경기 중 2경기를 토요일에 개최키로 했는데, 문제는 토요일 2경기가 복표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총 대상 13경기 가운데 6경기가 세리에B(2부)와 세리에C1(3부)의 경기로 대체된 점이다. "세리에B와 C1의 적중은 훨씬 어려운데다 토요일 경기로 전환된 팀의 연고지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이 복표를 사려고 하지 않는다. 토토칼초란 팀과 선수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돈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라며 올림픽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단순히 복표사업이 그 사업에 국한되지않고, 방송이나 협력기관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움직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3. 토토칼쵸의 경제적 효과

또한 '축구복표사업을 개인 또는 단체에 수탁할 수 있다'는 관련법 조항이 거센 찬반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조항이 삽입되면 국내 또는 외국의 복표전문회사가 참여하는 길이 열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산하의 진흥공단이 사업권을 쥐게 되며, 만약 민간에서 이 복표사업을 운영하게 되면 자칫 무분별한 사행성을 조장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무래도 민간의 운영은 상업성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간 기업이 외국기업이라면 '외화 유출'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반면에 진흥공단이 운영할 경우는 실제 체육기금 조성액을 기존 계획대로 25%만큼 확보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된다. 아무래도 정부 주최로 일이 진행되다 보면, 당초 계획에 없던 다른 사업에 매출액이 투자되는 등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23년 세계최초로 풀스 사업을 실시한 영국은 지난해에만 40억 파운드(10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액 중 40%는 배당금으로 26.5%는 세금, 13~14%는 운영비, 4.5%는 축구 기금. 3%가 체육 및 예술지원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1위 당첨자의 상금이 무려 1백만파운드(22억원)에 달해 사행심을 조장하는게 아니냐하는 비난이 있기도 했지만, 최근 영국 정부가 실시한 '갬블링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풀스는 가장 무해하고 현실적이며 인기 있는 여가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축구복표 게임은 단지 돈을 들여 우연에 의한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각 팀의 전력 등을 면밀히 분석해야 하는 '지적 게임'이라는 것이다. 또 영국의 타이거풀스를 운영하고 있는 리틀우즈사는 수익금의 상당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타이거풀스의 크리스토퍼 베이커 사장은 "축구가 발전하려면 경기장 건설이나 청소년 축구 육성기금이 필요하다. 오늘날 영국축구의 발전이 타이거풀스의 도움 없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한다. 얼마 전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 '타이거 풀스(Tiger Pools)'사가 영국의 축구복표 사업체다. 타이거 풀스는 십 년간 국내 사업 독점을 전제로 월드컵 경기장 건설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해 국내 축구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은 타이거 풀스의 제안에 대해 축구 복표 사업은 축구 발전에는 긍정적이나 외국 기업에 전담하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복표 사업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축구를 양성할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선 축구의 활성화와 2002년 월드컵의 원활한 준비를 위한 재원의 충당을 들 수 있다. 즉 경기장 건립기금, 프로축구 활성화기금, 월드컵 조직위원회 지원기금 등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축구 복표 사업이 본격화되면 매출액은 2조 5천억 원까지 예상된다. 그중 절반은 당첨금으로 지급되어지고, 복표 사업 운영에 25%를 사용하고 나머지 25%는 축구 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축구복표은 인터넷 등을 통해 해외에서의 배팅이 가능케 함으로써 국내 축구에 대한 범세계적인 관심과 이를 통한 국위 신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화획득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4. 경기의 질적인면에서의 효과

다른 한가지는 승부조작이나 심판의 오판으로 인한 승부가 많아져 스포츠의 정신을 위배한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승부조작이나 심판의 오판으로 관중들이 떠나고 있는 그라운드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축구복표 '원조' 이탈리아는 지극히 낙관적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인다. 토토칼초의 총 13경기를 당첨시키도록 승부조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면서 실제로 누군가 선수들을 매수해 토토칼초의 결과를 조작한다해도 당첨금과 매수하는 데 필요한 금액의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 않으며, 총 26개팀 300여명의 선수들을 모두 매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물론 이탈리아 축구계에도 승부조작 사건은 일어나고 있다. 지난 80년 명문 AC밀란이 연루된 사건은 AC 밀란 구단주를 비롯해 관련자 전원이 구속되고, 선수 2명이 축구계로부터 영구 제명되는 등 총 23명이 사법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다른 유럽국가에서 적발된 승부조작처럼 특정 경기의 확실한 승리를 위해 상대 선수를 매수한 경우로 토토칼초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축구대국답게 심판 판정에 대한 시각이 엄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심으로 보여지는 판정은 신문 지상 등 텔레비전이 매우 엄격하게 검증하고 비판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오심'을 토토칼초 결과에 연결시키려는 풍조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심판도 합리적인 판정을 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3. 결론

이탈리아 축구가 선진 축구 문화를 이끌어 가는 것에는 이탈리아인의 축구사랑과 축구복표의 역할이 분명 있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만들어진 경기장과 클럽 축구 문화, 각 팀 별로 잘 조직된 팬클럽 등의 역할도 크다. 이러한 여러환경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이탈리아는 축구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탈리아의 울트라에 못지않은 서포터스가 존재하고 있고,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면 훌륭한 시설의 경기장도 가지게 된다. 문제는 관심이다. 얼마나 축구에 대한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축구문화는 달라질것이 분명하다. 100여년의 시간을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축구복표를 통해 얻어질 국민의 관심과 비용이 우리나라의 축구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탈리아 축구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많이 늦었다는것을 더욱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걸었던 길을 우리도 같이 걷기 시작했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드는것은 왜 일까? 물론 우리의 축구가 이탈리아처럼 월드컵정상에 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유벤투스의 홈페이지에 이제 불과 7-8살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잘 손질된 잔디위에서 축구하는 사진을 보는 순간,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하는 우리선수들이 너무 측은하게 느껴졌고 그 열악한 우리의 환경속에서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린축구선수들이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서 축구하면서 무릎이 다치지 않는 날이 왔으면 한다. 질책보다는 관심으로 이제, 조금은 멀어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수정해야할 사항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그리스는 발칸 반도..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습니다.

 

내용출처 : http://www.pufs.ac.kr/~italy/calcio.htm

출처 : 이탈리아 축구의 모든것
글쓴이 : rock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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